1996년, 대학 3학년 때 제임스 볼드윈 강의를 들으며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읽었습니다. 혁신적인 소설, 논란의 희곡, 찬사를 받은 에세이까지. 하지만 교수님이 간략히 언급한 한 권의 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읽었죠. 바로 1976년 영국에서 출간된 동화책 <리틀 맨, 리틀 맨: 어 차일드후드 스토리>였는데, 당시에는 절판 상태였습니다. 호기심이 생겨 데이비드 리밍의 최근 볼드윈 전기를 찾아봤지만, 그 책에 관해선 단 한 단락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무명 화가 요란 카작이 삽화를 그렸다는 내용과 함께 리밍은 그들의 관계를 "우정"이라 표현했지만, 다음 문장에서 더 깊은 무언가를 암시하듯 이렇게 적었죠. "요란은 볼드윈이 갈망하던 지속적인 관계의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그는 가족을 우선시했고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이런 세부 사항들은 제 호기심을 더 자극했습니다. 리밍에 따르면 볼드윈이 요란의 세 번째 아이 대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1952년 스위스에서 다른 친구의 결혼식과 세례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떠올랐을 거라고 합니다. 볼드윈은 이후 <비일 스트리트를 운하다>를 요란에게 헌정했는데, 이는 <조반니의 방>을 뤼시엥에게 바친 것과 같은 방식이었죠.
제게 "뤼시엥"은 볼드윈이 생애의 사랑이라 부른 스위스인 뤼시엥 하퍼스버거였습니다. 파리에서 클로스터된 미국인과 이탈리아 남자의 관계를 그린 1956년작 <조반니의 방>은 제가 중3 때 처음 읽은 볼드윈 소설이었죠. 쌍둥이 여동생 책을 몰래 빌려 매트리스 밑에 숨겨두고 읽었습니다. 가족들이 책을 보고 제가 게이임을 눈치챌까 봐 두려웠죠. 당시엔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남자와의 비밀스러운 관계에서 회복 중이었고, 마침내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습니다. 볼드윈은 제 길잡이였죠. 그는 어떻게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의 정체성과 이별의 아픔을 헤쳐나갔을까? 그 경험이 작가로서 그를 어떻게 형성했을까? 저 역시 그런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얼마 후, 예일대학의 베이네키 희귀본 도서관에서 <리틀 맨, 리틀 맨>을 찾았습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는 <조반니의 방>을 처음 펼쳤을 때처럼 전율이 느껴졌죠. 큰 글자와 화려한 삽화로 어린이 책처럼 보였지만, 표지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저자 사진 대신 카작이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그는 웃으며 볼드윈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고, 볼드윈은 담배를 물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이메일을 이용해 코네티컷 대학의 데이비드 리밍 교수에게 요란 카작에 대해 더 아는 게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답장했는데, 카작을 만난 적도 없고 그를 아는 사람도 모르며, 아마도 고인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는 내용이었죠.
7년 후, 컬럼비아 대학 박사 과정을 위해 뉴욕으로 이사한 저는 파리의 미술사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몇 달 뒤, 브루클린 아파트에서 전화가 울렸습니다. 강한 프랑스 억양의 목소리가 말했죠. <"파리에 사는 요란 카작입니다. 당신이 저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마저 귀신의 전화를 받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열리는 자신의 전시회에 초대하며 직접 만나자고 했죠. <"지미(볼드윈)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말과 함께.
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신용카드를 만들고 찾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예약했죠.
그 전화는 20년이 넘는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뉴욕에서 파리, 토스카나, 프랑스 남부, 코르시카, 마지막으로 터키까지. 저는 볼드윈의 가장 오래된 친밀한 관계와 예술적 동반자들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섰습니다. 뤼시엥 하퍼스버거, 요란 카작, 볼드윈의 평생 멘토이자 흑인 게이 화가인 보퍼드 딜레이니, 그리고 1960년대 초 볼드윈이 따라 터키로 간 배우 엥긴 세자르까지. 볼드윈은 이스탄불에서 <어나더 컨트리>(1962)와 <더 파이어 넥스트 타임>(1963)을 완성했습니다.
카작의 전화는 또한 <리틀 맨, 리틀 맨>을 재출간하려는 제 노력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2018년, 제가 처음 그 책을 읽은 지 22년 만에 이루어졌죠. 비슷한 시기에 저는 제임스 볼드윈 전기를 쓰기로 첫 출판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난제는 볼드윈의 관계를 어떻게 서술할지였습니다. 그의 관계는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들이었죠. 볼드윈이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내 애인이었던 남자들에게 '게이'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거야."> 그는 주로 여성에게 끌리는 남성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퍼스버거는 후에 흑인 배우 다이애나 샌즈와 결혼했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볼드윈의 희곡 <블루스 포 미스터 찰리> 리허설 중 시작되었죠.) 세자르 역시 <조반니의 방> 워크숍에서 조반니 역을 맡은 후 이스탄불로 돌아가 배우 굴리즈 수루리와 결혼했고, 그녀는 볼드윈의 친구이자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볼드윈보다 20년 이상 연상이었던 딜레이니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처음 만난 16세 소년 볼드윈에게 반해 <"영적 아버지">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이런 관계들 중 그 어느 것도 전통적인 범주에 딱 들어맞지 않았지만, 그들은 평생 볼드윈을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예술을 형성했고, 인권 운동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대륙을 넘나드는 소속감을 주었죠.
<더 파이어 넥스트 타임>에 수록된 <다운 앳 더 크로스: 레터 프롬 어 리전 인 마이 마인드>에서 볼드윈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이 그 문을 열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힘도 열 수 없을 거야."> 그의 모든 소설은 어떤 면에서 사랑 이야기입니다. 1952년작 <고 텔 잇 온 더 마운틴>에서 엘리샤를 향한 존의 사춘기적 동경부터 <조반니의 방>, <어나더 컨트리>까지. 심지어 할렘을 배경으로 한 흑인 이성애 커플의 이야기인 <비일 스트리트를 운하다>(1973)도 카작과의 관계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카작과의 대화를 통해 저는 그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볼드윈의 마지막 위대한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티쉬와 폰니를 갈라놓은 힘은 사법 제도의 인종주의였다면(폰니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볼드윈과 카작 사이의 장벽은 더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티쉬의 말은 볼드윈이 카작과의 이별에 대해 느낀 감정을 완벽히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유리 너머로 바라봐야 하는 사람이 없길 바래.">
결국 사랑은 볼드윈의 가장 위대한 주제였습니다. 이 여정의 끝에서, 저는 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습니다: <"이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연구하고 집필해온 것은 사실 제임스 볼드윈의 새로운 전기였지만, 처음부터 그것은 한 편의 사랑 이야기였음을.">
<볼드윈: 어 러브 스토리>
$33 | BOOKSHOP
니콜라스 보그스의 <볼드윈: 어 러브 스토리>는 8월 19일 출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