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이라고들 합니다. 죽음과 세금이죠. 하지만 저에게는 12살부터 웨이트 워처스(Weight Watchers)가 피할 수 없는 세 번째 요소였습니다. 제 삶에 끊임없이 존재해왔던.
중학교 때부터 그 사이트에서 칼로리(그들이 ‘포인트’라고 부르는)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패턴은 20대 초반까지 이어졌죠. 케일, 바나나, 아보카도 같은 ‘저포인트’ 음식을 잔뜩 사놓았다가 결국 폭식으로 이어지는 식이었습니다. 저지방 치즈 케사디야 한 조각이 금요일 밤의 ‘특별 간식’으로 취급되는 플랫폼에서, 도미노스 치즈 브레드 가족 세트를 어떻게 기록하라고요? 20년 동안 웨이트 워처스와의 관계는 스스로를 굶주리게 하거나 과식하는 비참한 춤이었습니다. 진정한 배고픔과는 전혀 무관했죠.
그래서 지난주 웨이트 워처스가 파산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묘한 해방감이 스쳤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저는 정말로 이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치료와 회복 과정을 거치며 음식에 대한 제 접근 방식은 바뀌었습니다. 이제 다이어트도 하지 않고, 다이어트 얘기도 안 하며, 타인의 식습관이나 체형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의 자기 혐오를 기반으로 성장한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느라 낭비한 시간과 돈(정말 엄청났죠!)이 억울합니다.
물론 웨이트 워처스의 실패가 갑작스러운 다이어트 문화의 붕괴 때문은 아닙니다. 오젠픽(Ozempic)과 몬자로(Mounjaro) 같은 GLP-1 약물의 등장이 구독형 프로그램을 무력화시켰죠. 특히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젊은 층 사이에서요(솔직히 말해 장기적 성공률은 3%에 불과하지만). 웨이트 워처스가 체중 감량을 ‘지지하는 커뮤니티’로 포장한 건 오늘날의 오젠픽 열풍과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괴물입니다.
2000년대 초, 낮은 웨이스트 청바지와 드러난 힙본이 유행하던 시절을 겪은 저는 오젠픽 광고를 접하는 요즘 청년들이 어떤 메시지를 내면화할지 걱정됩니다. 어제 본 한 광고에서는 (아마도 주사로 체중을 뺀) 신부가 흰 드레스를 입고 들뜬 얼굴로 결혼식을 치르더군요. 웨딩 산업이 이미 체중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불친절한데 말이죠. 게다가 이 약물들은 고가인 데다 장기적 영향이 불확실하고, 모든 다이어트처럼 식습관 장애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보면, 마치 그들을 이런 약물로 내몬 체중 차별적 시스템(웨이트 워처스가 지탱해온)이 애초에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GLP-1 열풍이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 제 인생을 영원히 통제할 것 같았던 웨이트 워처스의 무너짐에 작은 만족을 느낍니다. 오랜 세월 제 손실이 그들의 이익이었죠. 이제야 웨이트 워처스는 무의미해졌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을 위해 어순 조정과 문화적 맥락 반영을 했습니다. ‘low-rise jeans’는 당시 유행을 고려해 ‘낮은 웨이스트 청바지’로, ‘visible hipbones’는 ‘드러난 힙본’으로 의역했습니다. ‘97% of diets fail’ 같은 통계는 한국어에서도 흔히 쓰는 표현을 차용했습니다. 마지막 문단의 ‘My losses were its gains’은 대조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제 손실이 그들의 이익’으로 번역했습니다.)